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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윤동주에 빠져서 2016-03-21 오전 11:49:39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1788

어쩌다가 윤동주에 빠져서

『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의 저자 김응교 교수

 


「별 헤는 밤」,  「서시」,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주옥같은 시들을 써낸 시인, 그리고 그 자신이 써낸 구절처럼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십자가」)며 신화가 되어버린 시인…… 윤동주의 71주기 기일을 맞아 그의 시와 삶을 섬세하게 복원해낸 평전 『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을 출간한 ‘윤동주 전문가’ 김응교 교수를 만났다.
 
‘처럼’이라는 제목이 독특합니다.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행복한/예수ㆍ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이라는 「십자가」의 구절에서 ‘처럼’이란 조사만 한 행으로 써 있는 것에 조금 놀랐어요. 제가 일본에 있을 때인데 “처럼”이 한 행으로 된 걸 보고, 일본어 시 중에도 “∼のように”라는 구절이 한 행으로 쓰인 경우가 있는지 찾아봤었죠. 그런데 일본어 시는 물론이고 영어 시, 중국어 시에도 ‘처럼’만 한 행으로 쓰인 시는 본 적이 없어요. 나아가 윤동주의 시에서 “처럼”이 나오는 구절을 다 찾아봤었지요. 그 결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동주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귀찮은 길을 ‘행복’한 길이라고 그는 씁니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도 ‘행복’한 주체가 되는 그 길을, 윤동주는 택한 것입니다. 이번 책의 「‘처럼’의 현상학」(300쪽)이란 꼭지에 이런 이야기를 상세히 써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윤동주에 빠졌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러니까 ‘어쩌다가’ 윤동주에 빠지게 되셨는지요.
 
간판에 쓰는 글씨와 시에 쓰는 시어(詩語)는 그것이 지시하는 깊이와 넓이가 전혀 달라요. 간판에 쓰는 글씨는 그것이 지명하는 대상만을 말하지만, 시에 쓰는 시어는 그 시어가 나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게 돼요. 가령 ‘사과’라고 사과상자에 써두면 사과의 가격이 자연스레 궁금해지지요. 반면 시에서 ‘사과’라는 단어가 나오면 사과를 만든 줄기, 뿌리, 흙, 나아가 뜨거운 햇살이며 살살 부는 바람까지 상상하도록 암시돼요. 문제는 독자들이 그런 상상력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에요.


윤동주가 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구절을 간판 글씨로 보느냐, 삶이 담긴 시어로 보느냐에 따라 독자가 느끼는 울림이 전혀 다릅니다. 이 표현을 그저 관념으로 볼 수도 있어요. 말장난으로 볼 수도 있어요. 근데 이 젊은 시인의 삶을 처음부터 한 편 한 편 살펴보면, 그냥 쓴 구절이 아니에요. 자신의 온 생애가 담긴 한 구절인 것이죠. 이런 구절을 일 초 만에 읽는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지요. 시인이 온 생애를 담아 썼으니, 독자도 온 생애로 만나야 하는 것이죠. 그간 제가 윤동주를 깔보았던 것은 그의 온 생애를 무시했던 것도 있지만, 그에 앞서 제 삶의 고민, 진지함의 밀도가 그 수준에 따르지 못했다는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홈리스 구호 일을 하면서 2000년대 중반 도요타 사태로 해고된 수많은 잡리스(job-less)들이 곧바로 홈리스가 되는 과정을 목격했어요. 그리고 2009년 1월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용산 철거민 사태를 그대로 목도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비극적인 슬픔, 그리고 세월호 사건을 체험했어요. 그 가족들은 살아 있지만 “모든 죽어가는 것”이었어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채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았을 때, 이 문장이 이해되었어요. 그러자 「서시」가 이해되고, 「팔복」이 단순한 외침이나 풍자시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어요. 「팔복」에 대한 해석(『처럼』, 263쪽)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유는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후 「십자가」, 「간」도 새롭게 볼 눈과 마음이 열렸어요. 비로소 윤동주의 마음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절실한 마음이 생겼어요.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널리 알려지고 애송되는 그의 시들은 몇 편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문제가 큽니다. 교과서에는 1941년 윤동주가 대학 사학년 때 쓴 「십자가」, 「서시」, 「쉽게 쓰여진 시」, 「간」 등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지요.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윤동주의 삶이 갖고 있는 전 과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니 진정한 울림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죠. 윤동주의 삶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 특히 그의 동시가 품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혹은 독자들이 주목해주었으면 하는 윤동주의 시가 있나요?
 
실은 이번 책에 다 쓰지 못했어요. 책이 더 두꺼우면 독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넣고 싶은 시를 다 넣지 못했어요. 예전에 『민족시인 신동엽』(사계절, 1993)이라는 책을 초판 이후 십 년 만에 완전히 새로 쓰다시피 했는데, 이번 책도 십 년 뒤에는 개정판을 내고 싶습니다. 그때는 이번 책에 못 들어간 아래 같은 시를 꼭 넣고 싶어요.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호주머니」는 1936년 12월에서 1937년 1월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시예요. 시에서 주인공이 호주머니예요. 호주머니는 걱정하고 있어요. 채울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가장 추운 겨울에 오히려 뭔가 채워지는 거예요. 그게 글쎄 주먹 두 개랍니다.


‘갑북’은 ‘가뜩’이라는 의미의 평안도 방언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랐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추운 겨울입니다. 그런데 소년은 주먹 두 개만 넣어도 자신감이 있나봅니다. 갑북갑북이라 했으니 주먹 두 개로도 자긍심이 가득가득한 상태입니다. 넉넉하지 않은 일상을 주먹 두 개로 견뎌내는 자신감으로 시인은 독자를 위로합니다. 염려도 절망도 “주먹 두 개 갑북갑북”이라는 해학으로 녹여버립니다. 겨울철이면 주머니 두 개로 갑북갑북거린다는 그의 명랑성 덕분에 남루한 빈곤이 오히려 수군대는 듯이 보입니다. 넣을 게 없으면 두 주먹이라도 넣는다는 자세, 작금의 현실에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김약연, 송몽규, 문익환 등을 윤동주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꼽으셨습니다. 특히 사촌형인 송몽규의 신춘문예 등단이 윤동주의 시작(詩作)에 큰 자극을 주었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요. 윤동주에게 송몽규란 어떤 존재였나요?
 
서로 격려하는 존재였다고 봐야겠지요. 서로 ‘경쟁’했다기보다는 ‘격려’하며 자신을 키웠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이 책은 ‘윤동주’를 중심에 두고 썼어요. 송몽규는 윤동주를 격려해준 친척 형으로 자리를 두었지요. 제가 계간<푸른사상>에 6회에 걸쳐 송몽규론을 쓴 적은 있지만 이후 새로운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어서 추론만 해야 하니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송몽규에게 윤동주 가족에 대한 본래적인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이들도 있어요. 송몽규의 아버지는 데릴사위 같은 처지였고, 아내는 본가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여기서 느껴지는 송몽규의 태도는 더욱 분발해서 열심히 살자는 것이었을 거예요. 같은 집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들을 다니고, 함께 감옥에 투옥되고, 끝내는 나란히 묻히게 되는 이 둘 사이를 보면 아름다운 친가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송몽규와 윤동주의 묘소에 갈 기회가 있다면, 윤동주의 묘 앞에서만 묵념하지 말고, 그 왼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송몽규의 묘 앞에서도 오래오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용되었던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을 보다가 윤동주가 생각보다 급진적이고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서 조금 놀랐습니다. 윤동주는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썼습니다. 이번 책의 「살리는 죽음」(432쪽)이라는 장에서 자세하게 썼습니다. 영화 <동주>에서도 그렇게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서 반가웠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돌변하는 부분이 있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게끔 변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동시에서 시작하여 자아성찰의 과정을 거쳐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는 다짐의 과정으로 나가는 정점에서 시(詩)로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지요.
 
초판본 시집 출간이나 영화 개봉 등으로 새삼 윤동주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저간의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금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윤동주가 우상이 되고,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는 현상이 염려스럽습니다. 남이 사니까 사는 사람도 있고, 윤동주의 이미지만 보고 껍데기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부 필사노트 가운덴 윤동주의 작품이 아닌데 윤동주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도 많습니다. 제대로 윤동주를 읽고 성찰했다면 소외당한 사람들을 돕는 등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윤동주의 정신입니다.


현재의 윤동주는 우상화된 면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친일파들이 국정 교과서 시대에 자신들의 면죄부로서 윤동주를 이용했습니다. 군부독재 시대에 이순신이 애국의 화신으로 이용되었듯이, 윤동주는 애국주의 코스프레로 이용되어왔습니다. 한나라당 의원이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읽을 때 괴기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애국을 들먹이며 부패한 자가 윤동주의 「서시」를 인용할 때 마음이 아픕니다. 윤동주가 바라던 것이 이런 모양은 아닐 겁니다.


또한 윤동주가 상품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을 위해 상품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게다가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풀린 올해는 봇물 터지듯 너 나 할 것 없이 윤동주의 책을 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윤동주를 정확히 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 책도 엄중한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판매되는 식품 중에는 불량식품도 있지만, 야생 그대로 유통되는 좋은 먹거리도 있습니다. 영화 <동주>를 저는 아주 긍정적인 상품으로 보았습니다. 시사회와 기자회견 때도 밝혔지만, 잘 만든 작품이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한 긴 글을 쓰려고 합니다. 반면 이건 아니다 싶은 상품과 이벤트들도 많습니다. 잘못 만든 시집도 너무 많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윤동주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윤동주를 ‘자기성찰의 시인’으로 보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 윤동주를 잘못 알면 나르시시즘의 수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이유가 가장 큰 것 같아요. 언론이나 교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윤동주를 ‘자기성찰’에 가둔다는 점이죠.


또하나는 윤동주의 시를 읽다보면 어떤 보이지 않은 따사로운 실체가 있는 듯한 위로를 느끼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윤동주는 ‘큰 고요’(자기성찰)를 통해 슬픔과 기쁨 ‘곁으로’ 가려던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번 책의 「큰 고요 곁으로」(502쪽)라는 장에 윤동주 시의 다섯 가지 특징에 대해 썼습니다.

 

첫째, 윤동주의 시는 자기와 존재를 투시하는 ‘성찰의 언어’다.
둘째, 윤동주의 시는 기억해야 할 것을 ‘한글’로 기록한 ‘기억의 집’이다.
셋째, 윤동주는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곁의 시인’이었다.
넷째, 윤동주의 사랑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거대한 사랑’이었다.
다섯째, 윤동주의 시는 실천을 자극하는 ‘다짐의 시’다.

 

이 다섯 가지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윤동주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알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우상이나 상품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시집이나 상품을 구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했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윤동주의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들 문제, 반값 등록금에 속은 대학생들, 용산 철거민들, 세월호 유족, 위안부 할머니 문제 등에 다가갈 때, 연탄 나르기라도 할 때, 독거노인에게 반찬을 드릴 때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없이 책만 읽고 영화만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소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윤동주는 ‘배설’의 한 방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 변혁에 대한 진정한 실천 없이 체 게바라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꼴입니다.


윤동주를 ‘자기성찰의 시인’으로 가두지 마세요. 그의 삶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서시」)로 끝나지 않았어요.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으로 가두지 마세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자세를 갖고, “행복한 예수ㆍ그리스도/처럼” “모가지를 드리우”는 실천을 할 때, 바로 그때 이 사회에 혁명이 시작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윤동주 현상’일 것입니다. 윤동주는 ‘자기성찰’이라는 큰 고요 속에서 사회적 변혁을 다짐했던 시인입니다. 졸저 마지막 문단이 제 생각을 응축해놓은 결론입니다.

 

윤동주는 만들어진 우상이나 상업적인 문화 상품이 아닙니다. 윤동주는 엄청난 독서와 진지한 삶의 자세로 지리멸렬한 시대에 진지하게 응전했던 젊은이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독자들에게 참혹한 시대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버티고 이겨내라고 권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 있는 인간의 위엄을 지키라고 나지막이 권합니다. 독자들이 각자 ‘얼음물 속의 한 마리 잉어’가 되어야 한다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철저한 자기성찰로부터 출발하여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제시했습니다.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가”(김수영, 「푸른 하늘을」)라고 했던 그 자세가 윤동주의 시에도 보입니다. ‘윤동주’라는 이름은 우리 자신과 이 사회를 조용히 혁명시키는 큰 고요입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의 자세는 끔찍한 빈곤과 온갖 자연재해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시는 “어진 사람들”을 호명하며, 위로와 눈물로 여전히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습니다.

 

출처 : Yes24

http://ch.yes24.com/Article/View/30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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