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내가 읽은 책 이야기-임원선 (국립중앙도서관장) 2016-02-29 오후 2:12:03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1646

내가 읽은 책 이야기

내가 읽은 책의 첫 기억은 <소년중앙>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서울 사는 큰 누나가 <소년중앙>을 달마다 보내주었다. 올 때가 되면 우체부가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보고 또 보고, 매번 열 번도 넘게 보았던 것 같다. 소시지 광고를 보면서, 그 때는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

9남매 막내였던 내게 흔했던 것은 형과 누나들이 쓰던 교과서였다. 그 중에서도 <국어>는 학년과 관계없이 읽을거리가 많았다. 집에 있는 모든 책을 닥치는 대로 읽던 그 시절, 요즘으로 보면 선행학습을 한 셈이다.
여름에는 참외밭에 원두막 지키는 일이 많았다.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시간을 그나마 보낼 수 있게 해준 건 엿장수가 엿과 함께 가지고 다니던 만화였다. 다 본 만화 세 권을 두 권으로 바꿔보는 식이었다. 다시 세 권을 받으려면 열심히 빈 병과 비료포대를 모아야 했다.

읍내 중학교에 갔을 때, 도서관이 따로 있어서 정말 좋았다. 도서관에 장서가 만 오천권이나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교장선생님이 기억난다. <암굴왕> <장발장> <알프스 소녀 하이디> <왕자와 거지> <플란다스의 개> <해저 3만리>같은 책은 지금도 기억난다. 책 뒤에 꽂힌 대출카드에 내 이름이 적히는 게 좋았고, 대부분의 카드에 내 이름보다 먼저 이름을 올린 선배에게는 은근 경쟁심도 생겼었다.

서울서 우체국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둘째 형이 가져다 놓은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으로 방학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는 잘 모르고 그냥 읽었지만 명작이라 꼽히던 문학작품을 그 때 거의 모두 읽은 거였다.

대학은 형 둘이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던 터여서 고맙게도 4년 장학금을 보장해주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가기는 갔지만 마음은 많이 혼란스러웠다. 이때를 넘길 수 있게 해준 것이 <대망>과 <후대망>이었다. 그냥 도서관 서가 사이를 헤매다가 발견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어느새 한 학기가 지났고 마음도 정리되어 있었다. 도서관이 개가식으로 운영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당시 도서관이 개가식이었던 곳이 숭실대와 서강대뿐이었니 내게는 행운이랄 수 있다.

그리고 좀 있다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읽고 싶은 책보다는 읽어야 하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1차 시험을 세 번, 2차 시험을 네 번 치르는 동안 같은 책을 적게는 두세 번, 많게는 열 번도 넘게 읽었다. 일곱 여덟 번째 읽어도 자꾸 새로운 게 나오는 걸 보며, 한 번 읽고는 읽었다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오만임을 알았다.

또 한 번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미국 유학시절이다. 일요일 성당에 다녀온 후부터 다음 금요일 오후까지, 그리고 아침에 아이 둘을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다준 다음부터 대학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늦게까지, 2년 동안 저작권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을 통독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로부터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덕을 보고 있으니 투자라면 참 좋은 투자를 한 셈이다.

돌아보면 책은 이렇게 내가 세상을 알아가고, 버티고, 그리고 열어가는 힘을 주었다. 내 인생에서 이 부분을 빼면 뭐가 남을 것인가는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출처 : 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
http://www.nlcy.go.kr:8089/column/column/view.dio?year=&month=&page=1&pagelistno=1&seq=170&search_title=&search_value=#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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