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독서와 글쓰기, 생각하는 존재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2013-10-25 오전 10:46:27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281

살면서 누구에게나 만남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나 생물일 수도 있고, 한 편의 영화, 한 권의 책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만남, 삶을 흔들 수도 있다.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들어 변화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서게 만드는 것. 그런 만남, 우리는 멘토(링)라고 부른다. 여기, 아홉 명의 명사들이 십 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책이 있다. 『개똥 세 개』. 아홉 명의 저자 가운데 같은 제목의 글을 쓴 홍세화 선생이 지난 10월 12일, 서울 송파도서관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홍세화 선생님과 함께하는 내 삶의 멘토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의 강연 현장을 담았다.
 

 
 
개똥 세 개 이야기

부모와 일찍 헤어진 홍세화 선생에게 첫 멘토는 외할아버지였다. 홍 선생은 외할아버지가 중학교 때 해주신 말씀을 꺼냈다. 외할아버지 왈. “사람은 거친 사람과 부드러운 사람이 있는데, 부드러운 사람이 항상 손해 보게 돼 있단다. 거친 사람에게 외려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이지. 그래서 부드러운 사람에겐 신경 쓰지 않고 소홀하게 돼. 너도 조심해야 할 게 있단다. 부드러운 사람에게 소홀하지 말거라. 너는 손해 봐라. 다시 말해 계속 부드러운 사람으로 살아라.”

‘개똥 세 개’는 그런 외할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였다. 요약하면 이랬다. 서당 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치면서 각자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봤다. 첫째는 정승이라고 답했다. 선생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한다며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둘째는 장군, 선생은 역시 기분 좋은 반응을 보였다. 막내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장래희망은 관두고 개똥 세 개가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서당 선생이 왜라고 물었다. 막내가 답하길, 나보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큰 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하니 입에 개똥 하나를 넣어주고, 나보다 겁 많은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니 개똥을 넣어주고 싶다. 마지막 개똥은 어디에 쓸 것이냐고 서당 선생이 물었다. 이때 외할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막내가 뭐라고 답했을까.

“서당 선생에게 먹이려던 것 아니냐, 두 형의 엉터리 대답을 듣고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외할아버지는 맞았다며 흡족해한 만큼 서당 선생의 자격을 드러낸 것이라면서 덧붙인 말씀이 있다. 네가 살면서 막내처럼 누군가가 세 번째 개똥을 먹어야 된다고 말해야 할 즈음 말을 하지 못하거나 침묵하게 될 때 그 개똥을 네가 먹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개똥을 어떻게 하면 ‘덜’ 먹느냐의 싸움이 내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더 따질 것은 나는 자신을 막내와 일치시키고 있는데, 왜 나는 맏형, 둘째형과 일치시키지 않고 막내와 일치시켰을까. 나는 책 읽기를 즐겨하나, 사실 노는 것을 더 좋아하고, 둘째처럼 겁이 많은 사람이거든. 그래서 이 개똥 세 개가 내 삶의 반면교사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개똥 세 개 모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니 내 삶을 줄여서 말한다면 ‘개똥 세 개와의 싸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p.228)
홍 선생은 어릴 때 내가 공부를 잘 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판검사, 의사 등 특정 직업인이 되라는 말씀은 않으셨다. 두 분 나름의 철학이 있었던 것이라고 홍 선생은 짐작한다. 그는 이런 멘토를 가진 것을 복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어렸을 때 꿰매진다”는 프랑스 속담을 들며, 어렸을 때 사람은 형성되기 때문에 어린 시절 누구를 만나는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구체적이거나 현실적인 전망에 관한 얘기보다는 “보잘것없는 미물도 허물을 벗어야 성장하거늘, 사람은 허물도 벗지 않고 나이만 먹으면 성장했다고 한다”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p.227)
“요즘 가족 간 대화가 많이 없어졌다. 50~60년대 네덜란드의 한 학자가 당시 한국의 대가족 제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그는 삼대가 함께 사는 게 자연 상태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지혜를 자연스레 전수받을 수 있고, 핵가족은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것일뿐, 적절한 삶의 형태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개똥 세 개가 내겐 살면서 부닥칠 수밖에 없는 화두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문인으로서 활동하신 김학철이라는 분의 유언을 기억한다.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불의에 맞서라.”




내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홍 선생은 이 말을 꺼내며 내 생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보자. 근대 인간으로의 전환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말이다. 여기에 연결해 스피노자가 강조한 것은 생각의 성질이다. 생각하는 존재의 생각 자체에 성질, 즉 고집이 있다고 말했다.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내가 가진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됐을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고집’만 남는다.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내 생각으로 자리 잡게 됐는지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사유하는 방식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은 고집이요, 반대쪽은 회의다. 홍 선생은 한국 사회는 고집 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이점이 한국사회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 생각을 변화시켜야 그만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설득이 잘 안 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나 자신 역시 설득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운 점을 낳는다. 그렇다보니 대부분 사람은 설득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 심지어 부부 간에도 정치적인 지향이 다름을 확인하면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그만큼 겉돈다는 셈이다.

홍 선생은 우리 사회에 고집만 남아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인문학적 토대가 없고, 인간관계가 피상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유하는데 있어서 외로운 존재다. 그 외로운 존재들이 매달리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빤하다. 이른바 ‘돈이 되는 것’이다. 돈을 통해 외로움을 달랜다.

“인간관계에서 가까워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대화와 설득이 있을 터인데,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봄으로써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로운 존재로 남는다. 고집이 내 삶을 지배한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 사회 구성원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출발점은 내 생각이 어떻게 내 생각이 됐는지, 생각을 어떻게 형성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선 20대만 돼도 존재의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성찰이 필요하다.”

문제는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는 믿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유방식은 그렇다.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회의하는 쪽으로 가기는 너무 어려워진다는 것. 많은 우리는 성숙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데만 익숙해있다. 홍 선생은 어제의 나에서 얼마나 성숙했는지 비교하지 않는다며 인문학적 성찰이 생길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과 비교하면서 경쟁할 것을 요구하는 수레바퀴 속에서 ‘남’보다 우월해야 하므로 내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이 된 것이다. 어제보다 더 성숙한 오늘의 나, 오늘보다 더 성숙한 내일의 나를 비교하도록 요구받지 않았다.”(p.229)



생각하는 존재로 살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견준다. 홍 선생은 우리가 진짜 견줘야 할 것은 ‘어제의 나보다 얼마나 성숙했나’라고 지적한다. 고집이 사회문화적 교양을 고양하는 것을 막고, 외로운 존재로 만든다. 그러니 다른 데서 뭔가를 찾으려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와 만났다.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됐다. 남과 물질로 비교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한국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와 견줘 살펴보자. 사회화 과정에서 생각이 형성되는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제도화 교육의 맹점이다. 학문은 크게 두 가지다. 자연과학?수학과 인문사회과학이다. 자연과학?수학은 정밀과학이다. 정답이 있고, 찾아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다. 정답이 없다. 물음이 중요하다. 사유해야 한다. 가령, 사형제도는 필요한가. 정답이 없다. 즉, 생각해야 한다. 각자의 사유와 논리, 인식능력, 감수성이 필요하다. 이것을 토론하고 얼마만큼 갖고 있는가를 평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글쓰기다. 그런데 우리는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암기를 한다.”

학교에서조차 글쓰기를 제대로 안 한다는 것, 학생들에게 사유할 것을 요구하지 않음이다. 우리의 제도 교육은 학생을 암기하는 기계로, 입력만 시킨다. 홍 선생이 늘 강조하는 말씀이 있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 문제는 제도 교육은 두 개 모두 안 한다는데 있다. 정답이 없는 인문사회과학에 정답이 있다고 왜곡시키고 있다. 우리의 제도교육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을 외우게 하지만 학생들을 생각하는 존재로 대접하지 않는다. 생각을 묻지 않는다. 그저 암기하는 기계일 뿐이다.

“교실을 보라. 점수가 높은 학생 외에는 다 자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를 같이 할 때,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자기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나를 형성할 때 내가 개입?참여해서 형성하는 과정이 있고, 대상으로 흡수하고 주입받는 과정이 있다. 자기 주도적이고 주체적이 되기 위해선 ‘폭 넓은’ 독서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의 삶을 참조하는 행위다. 그리고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과 생각을 나눠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열려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직접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과 여행이 포함될 수 있겠지. 앞선 세 개를 버무리는 성찰이 중요하다. 나의 개성, 정체성, 처지가 만나면서 형성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기 생각의 형성을 막는 대표적인 것이 대중매체다. 흡수, 주입시킨다. 나는 대중매체에 개입할 수가 없다. 대중매체는 자본이 장악했다. 주입식 암기는 국가권력이 장악, 자신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게끔 만든다. 홍 선생은 최근의 일부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그런 사례라고 말한다. 한국에선 모순된 잣대가 있다. 진보적인 사람이 말하는 것은 의식화라고 표현하지만 주입식 교육은 의식화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조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되려면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이 선배 잘못 만나는 것이다(웃음). 선배와의 관계를 통해 『전태일 평전』 과 같은 책을 소개 받고 스스로의 생각이나 확신에 회의를 가진 사람이라야 비판적 의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것조차도 굉장히 투박한 것이다. 이러한 의식 형성의 얼개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고,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는 가장 중요하게 제기돼야 할 질문이다.”

홍 선생은 마지막으로 유럽에서 읽었던 육아법(0~36개월)의 인상 깊었던 두 가지를 언급했다. 생후 2개월 무렵, 아이는 걸핏하면 자다 깨서 칭얼대고 안아주지 않으면 잠이 안 든다. 육아법의 저자는 지긋이 지켜보면서 안아주지 말라고 권한단다. 대신 아이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라고 덧붙인다. 너를 지켜보고 있지만 네가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줄 수는 없다. 4~5일만 견디면 아이는 칭얼대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둘 거라고 책은 말했다.

이어 아이는 15개월 전후해 말을 시작하는데, 아이의 동선에 녹음기를 설치해 아이가 하는 말을 만 36개월까지 녹음한 결과, 아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엄마이며, 둘째는 ‘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는 것. 이에 유럽 엄마들은 아이의 ‘왜’라는 질문에 비교적 성실하나 한국에는 ‘크면 다 알아’라고 말하는 불성실한 엄마가 많다고 꼬집었다.

“그런 질문이 쓸 데 없다고 생각하는 건 엄마의 인식 체계일 뿐 아이의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이는 왜라는 질문을 접는다. 이건 치명적이다. 가장 가까운 부모가 생각하는 존재인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왜라는 질문을 누구에게 던질 수 있을까. 없다. 한국은 왜라는 질문이 죽은 사회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왜’는 어디서도 살아날 수 없다. 가정에서 왜를 살리고, 학교에선 학생들을 사유하는 존재로 대접하는 문제, 글쓰기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질의응답

의로움과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도 자신의 고집에서 비롯되거나 주입식으로 형성된 것일 수도 있잖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 문제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는 없을 것이다. 진리든 정의든 힘이 없다. 반면 권력이나 금력에는 힘이 있다. 정의력, 진리력, 이런 말은 없잖나. 맹자가 인간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어여삐 여기는 마음과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마음이다. 그것들이 인간성의 내용일 텐데, 이것을 확장하려는 마음이 정의라고 본다.

<말과활> 최근호에 “말의 진지를 구축하라”는 말이 있더라. 이때 말과 진지는 어떤 종류의 말이고, 어떤 종류의 진지인지?

말은 사유다. 사유함으로써 실천이 있고, 사유가 죽어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우선 생각하라는 것이 말, 언어다. 진지는 말을 교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단지 몇 명이 공부하는 것도 작은 진지일 수도 있고, 목표의식을 가지지 않더라도 작은 출발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부산에 많이 있던 게 양서조합인데, 이런 것이 말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세계를 함께 보고, 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끼리 진지를 구축하면 좋겠다.


(※ 이미지는 2012년 10월 24일 현장취재 사진으로 본 강연과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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