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책이 있어 내 인생은 즐거웠다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2014-11-20 오후 5:24:48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429

청소년 시절에 책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전의 필요와 욕망에 휘둘리며 볼품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을 살고 있을 게 뻔하다. 인생의 진경을 모른 채 이기적인 독신자나 타고난 본능과 우연에 기대 사는 평범한 직장인, 혹은 편견과 편집증에 사로잡힌 답답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조금 더 숭고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피와 땀을 바치는 일이 왜 즐겁고 고통스러운지를 몰랐을 것이다. 나와 30분이나 1시간 정도 얘기를 나눈 뒤 내게서 심신이 무엇엔가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명랑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래서 대화가 즐겁고 기분이 화창해졌다면 그것은 내가 햇빛과 책의 혜택을 충분히 받은 탓이다.

청소년 시절의 나는 날이 밝고 아침이 올 때까지, 아침에 잡은 책을 어두워질 때까지 들고 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토록 책에 몰입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나의 책 읽기는 오래 굶주린 자가 음식을 앞에 두고 보이는 태도와 비슷했다. 나는 골방에서 도서관에서 책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나는 책을 읽고읽고 또 읽었다. 내가 정신없이 책을 탐한 것은 그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새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뛴다.

책 읽기는 우선 내가 모르는 남과 그의 세계와의 만남이요 교감이다. 내가 그 책을 읽고 있는 동안 그 책을 지은이와 만나는 것이다. 만남은 대화와 소통으로 이어진다. 타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동안 뜻밖에도 내면의 들뜸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고독은 위로받는다. 책을 읽으면 강박과 고독은 그 부피가 줄고 기쁨과 지혜는 커진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도축장에 도착한 듯 신음하고 울부짖는 가축들은 잠이 들고 내 안의 지옥들은 문을 닫는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난 뒤 밀려드는 벅찬 감동과 함께 세상의 무질서와 혼돈을 제압하고 이윽고 샘물처럼 괴는 고요와 평화가 나는 좋았다.
그러나 책 읽기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책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사유의 풍요를 약속한다. 책은 사람과 사물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키워준다. 책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고 옳은 것에 관대하고 그른 것에 단호한 양심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책은 나쁜 습관과 악덕에 분노하고 대항하는 힘을 키워준다. 좋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나쁜 친구의 유혹에 빠지거나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 굳건한 내면의 도덕을 세우게 된다.

고백하건대 나는 책에서 먼저 앎을 구한 적은 없다. 내가 책에게서 먼저 구한 게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요, 깊고 장중한 울림이다. 늘 앎을 구하는 것이 즐거움을 구하는 것에 우선할 수 없다. 책을 읽고 난 뒤 들길이나 호젓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은 책의 자양분을 충분히 취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과정이다. 그 산책은 책에서 자극받은 사유와 상상을 키우고 무르익히는 시간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책은 내게 밥을 주고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돈을 벌어주었다. 책은 내가 필요한 것들을 전부 만들어주었다. 나는 책과 더불어 인생을 꾸려온 사람이다. 젊은 시절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지금은 책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물론 책을 만들고 쓰는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은 책을 읽는 일이었다. 책이 좋아 평생을 책을 모으고 읽고 쓰고 만드는 일에 보낸 것이다. 물론 사람은 책을 읽지 않고도 큰돈을 벌고 떵떵거리며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마음을 바쳐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분명 빛과 향기가 다를 것이다.

책은 다정한 누이요, 제 것을 한없이 퍼주기만 하는 관대한 벗이다. 왜 그런 누이나 벗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지 않겠는가! 책 읽기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고요하고 청정한 취미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다. 나는 여름엔 모시적삼을 입고 숲속에 들어가 한나절을 매미울음을 들으며 책을 읽다 돌아오는 것, 겨울철엔 발갛게 달아오른 난롯가에 앉아 바깥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독서의 삼매경에 빠지는 것을 인생의 진미라고 여긴다.
 
 
 
 
 
 
 
출처 : 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http://www.nlcy.go.kr:8089/column/column/view.dio?year=&month=&page=38&pagelistno=4&seq=8&search_title=&search_value=#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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