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기형도와 하루키가 나에게 알려준 것 - 김선미 (디자인칼럼니스트) 2014-09-01 오후 5:19:34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070

나를 키운 건 8할이 책이었다. 17살, 그러니까 이제 막 중학교 교복을 벗고 짐짓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던 고등학교 1학년 무렵 나는 기형도의 시집을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연극부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시집은 한 학년 위 연극부 선배가 품고 다니던 책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기형도 시집을 전리품처럼 들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17살 여고생에게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시어들을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기형도의 습기 찬 언어들은 이물감 없이 내 가슴에 박히고 머릿속에 새겨졌다. 17살은 그런 나이였다. 슬픔과 불안, 아픔과 우울함의 세계에도 선뜻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희망과 절망이 묘하게 겹쳐진 나이. 계몽적인 이야기보다는 인간이 겪는 다양한 감정선에 관해 더 많은 호기심을 느끼는 그런 나이 말이다.

그 시집은 기형도의 첫 시집이자, 동시에 마지막 시집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채 서른 살을 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시인의 유고시집이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기형도의 시어들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되었다.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출생뿐이었으므로’라고 담담히 말하는 그의 시는 어김없이 내 감정선을 건드렸다. 고백하건대 기형도 시집을 만나기 전 나는 사실 낙관과 긍정의 역사만이 가득하던 그런 아이였다. 그런 내가 쓸쓸하고 습기 찬 기형도의 시에 이토록 빠져들다니.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시어들은 힘이 너무 셌다. 여전히 그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무렵에도 기형도의 시집은 나와 함께였다.

활자로 된 모든 것을 사랑하던 나는 정해진 수순처럼 국문과에 입학했다. 인터넷이 막 태동하던 그 시절,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들이 우리 주위를 부유했다. PC통신 동호회를 통해서는 다양한 취향들이 종횡으로 얽혀 담론을 형성해나갔고 내 취향의 중심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나는 아직도 그의 소설 속 여자주인공의 이름을 활용한 메일 주소를 쓰고 있다)이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그 전에 읽던 소설들과는 문체부터 달랐다. 감각적이고 유머러스 하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이야기의 구조는 몹시도 첨예했다. 글을 읽는 내내 텍스트는 곧바로 비주얼로 변환되고 소설 속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대학가에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이 시작된 것이.

그런 그의 소설을 읽던 어느 날, 내가 왜 기형도의 시에 매료되었는지 알려주는 문장을 만날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는 문장은 기형도의 수필집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었다. 허겁지겁 기형도의 책을 펼쳐 그 문장을 찾아나갔다. 나에게 전혀 다른 색깔로 인식된 두 작가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마치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가슴이 뛰었던 그때가 아직도 선연하다. 그래, 죽음도 삶의 일부였다. 삶의 대극으로 인식한 죽음은 무섭고 불길했지만 삶의 일부로 인식한 죽음은 담담하고 편안했다. 왠지 인생의 큰 진리를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해가 뜨고 저물 듯, 꽃이 피고 지듯 자연의 당연한 섭리같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형도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대학 졸업 후 잡지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금도 글을 쓰며 책과 잡지를 만든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을 쓴 작가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서점에 가면 채 읽지 못한 책들이 집에 가득한데도 여기저기 서고를 기웃거리다가 한아름 책을 사들고 나오는 일상을 반복한다. 책이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얼마나 힘이 센 지 알기 때문이다. 내 나이를 거쳐간 그들의 말들이 내 삶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기형도처럼, 하루키처럼 내 삶에 툭 말을 건네는 작가들을 만나러 오늘도 서점에 간다.

 
 
 
 
출처 - 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http://www.nlcy.go.kr:8089/column/column/view.dio?year=&month=&page=3&pagelistno=1&seq=147&search_title=&search_value=#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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