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내가 그림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중학교 기술 선생님한테 배웠다. - 밥장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2014-08-11 오후 4:43:55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113

책 이야기를 꺼낼 때면 중학교 기술 선생님이 떠오른다.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어제 먹은 점심 메뉴처럼 생생하다.(어제 뭘 먹었더라?) 먹이를 안 주고 불빛만 깜빡거려도 침을 흘린다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다. 그는 한 마디로 달랐다. 다른 남자 선생님들은 대부분 오래되고 약간 꼬질꼬질한 점퍼를 즐겨 입었지만 그는 늘 잘 다린 양복만 입었다. 세탁소에서 갓 다려내 뜨거운 김이 아직 바짓가랑이 사이에 남아있는 듯 했다. 또한 그 당시 보기 드물었던 테 없는 안경을 쓰고 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은 깨끗이 빗어 뒤로 넘겼다. 목소리는 훤칠한 키에 걸맞게 언제나 힘이 넘쳤고 말투에는 함경도 사투리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눈빛 덕분에 결코 무섭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 중 유일하게 검은 색 중형 세단을 몰고 출퇴근하였다. 선생님이 직업이라기보다 왠지 취미나 놀이에 가깝게 보였다. 학교에서 받는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집에 돈이 너무 많지만 심심해서 학교에 나오는 거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은 우리를 크게 혼낸 적도 없고 학습 진도에도 별 달리 구애받지 않았다. 하지만 4행정 엔진의 구조와 회전운동을 수직운동으로 바꿔주는 캠에 대해서는 무척 꼼꼼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름이 시작되려는 5월의 어느 날 오후였다. 아카시아 향기가 문턱을 넘어 들어왔고 우리는 점심을 먹은 뒤 하염없이 졸고 있었다. 선생님은 소매 끝에 분필가루 하나 없이 잘 다린 감색 양복을 입고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대뜸 칠판에다 커다란 타원을 그렸다. 저건 또 어떤 엔진 부품일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우물을 어떻게 파는 디(파는 지) 아네?”

웬 우물? 모두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타원의 양 끝에서 두 선이 만날 때까지 직선을 주욱 그었다. 커다란 깔때기처럼 보였다. 확실히 엔진 부품은 아니었다.

“우물을 파려면 말이디. 먼저 넓게 파야한다구. 처음부터 깊게 파려구만 해서는 결코 깊게 팔 수 없다구. 깊은 우물을 파려면 먼저 넓게 파야디(파아지).”

선생님은 우물 파듯이 공부해야 하고 깊은 우물 파듯이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기술을 잘 배우려면 기술만 알아서는 안 된다고도 하였다. 중학교 2학년에게 너무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식곤증 때문인지 몰라도 알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우물 이야기는 그 뒤로 머릿속에 단단히 박혔다. 마치 화강암에 새긴 글자처럼 말이다.

시간은 몹시 냉정하게 흘렀다. 기술 선생님은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고 난 그때 선생님과 가깝게 나이를 먹었다. 노트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적었던 엔진의 작동 원리는 벌써 잊었지만 운전은 곧잘 하고 다닌다. 또한 기술 과목하고는 상관없이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살고 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다. 선생님은 기술을 잘 배우려면 기술만 알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좋은 그림이 되려면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너무 낯설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그리려면 먼저 보는 사람의 마음과 취향, 개성까지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림만 그려서는 그림을 잘 그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전공 서적만 읽어서는 전공 과목을 제대로 익힐 수가 없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그림과 관련 없는 소설이나 수필, 인문 분야부터 들른다. 심지어 기생충과 진딧물이 번식하는 방법을 애써 찾아보기도 한다. 깊게 파려면 먼저 넓게 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데 꼭 필요한 창의력은 대부분 전혀 관계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데서 나온다.

어느 광고에서 선생님이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냐고 어린 학생들에게 묻는다. 대뜸 ‘물이요!’라고 하는데 한 아이만 ‘봄이 와요!’라고 대답한다. 창의력이란 달리 말하면 엉뚱한 상상이며 낯선 것들에 익숙해지는 법이다. 그러려면 관계 없어 보이는 것들에 ‘애써’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의력의 열쇠인 넓은 오지랖과 설레발을 기술 선생님은 30년 전에 보여주었다. 그림에 대해, 책 읽기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난 중학교에서 이미 배운 셈이다.
 
 
 
출처 : 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http://www.nlcy.go.kr:8089/column/column/view.dio?year=&month=&page=3&pagelistno=1&seq=146&search_title=&search_value=#none)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