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내 인생을 바꾼 책 - 진회숙 (음악 칼럼니스트) 2014-07-14 오후 2:59:34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138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아버지 방의 책장에는 이광수의 <무정>,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단테의 <신곡>과 같은 문학서적을 비롯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등 온갖 종류의 철학서와 사상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틈날 때마다 아버지 서가에 꽂혀있는 책제목을 줄줄이 외우며 보냈다. 서가 앞에 서면 그때까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책의 대부분이 어린 내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저 저자 이름과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지적 포만감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는 볼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갈 때마다 당신이 읽을 책은 물론이고, 어린 내가 읽기에 좋은 책도 함께 사왔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바로 <안네의 일기>이다.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이 말을 듣고 누구나 의외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바꾼 책은 대개 감동적인 문학작품이나 역경을 이겨낸 위인들의 전기 혹은 세상을 바꾼 사상가들의 저서처럼 거창한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안네의 일기>는 나치즘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황금 같은 소녀 시절을 어두침침한 은신처에서 보내야 했던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인 소녀의 일기이다. 인생의 의미를 알 정도로 세상을 오래 산 것도 아닌, 이제 겨우 아동기에서 벗어난 풋과일 같은 사춘기 소녀의 일기가 인생을 바꾸어 놓다니..... 이것을 읽고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마흔 해가 넘을 때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안네의 일기>만큼 충격적으로, 그리고 <안네의 일기>만큼 전폭적으로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안네의 일기>를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갑자기 세상 희노애락의 비밀을 알아버린 어른의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라고나 할까. <백설 공주>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가 갑자기 유치해 보이고, 뜻도 모를 낭만파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삶의 슬픔이니 운명이니 비애니 하는 말들을 주워섬기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일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안네는 예술적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소녀였다. ‘키티’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일기에서 그녀는 그 나이 또래 소녀들이 느끼는 내밀한 감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밀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안네의 일기를 읽고 나서 나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안네처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일기쓰기는 나의 생활이 되었다. 일기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세계였으며, 나는 그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정말 예상치 못하게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열병처럼 끓어올랐다.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며칠 동안 끙끙거린 끝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해서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친구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이 소설 저 소설에 나오는 상투적인 줄거리를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소설을 쓸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랫동안 무모한 소설쓰기에 매달렸다.

처음 일기를 쓸 때만 해도 나는 내가 평생 글을 써서 먹고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안네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자기 고백 욕구를 일깨웠으며, 이것이 결국 나를 글쟁이로 만들었다. 그렇게 <안네의 일기>가 내 인생을 바꾸었다.
 
 
 
 
 
 
 
 
출처 : 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http://www.nlcy.go.kr:8089/column/column/view.dio?year=&month=&page=4&pagelistno=1&seq=141&search_title=&search_value=#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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