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추리소설과 권장도서 - 김홍민(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2014-07-11 오후 2:15:40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138

일전에 어떤 학생이 독서 상담 비슷한 걸 청한 적이 있다. 책을 읽고 싶은데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잡생각이 나서 집중이 안 되고, 그렇게 몇 장 읽다가 보면 자기가 뭘 읽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거다. 비슷한 사례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긴 글을 못 읽겠다는 하소연이었다. 책은 고사하고 인터넷상의 기사도 조금만 길면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우연히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스마트폰으로부터 아이를 구하라>를 보고 미국의 사립학교인 발도르프에 관해 찾아봤다.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창의적 사고, 인간 교류, 주의력 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구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휴대폰, 아이패드, 노트북 등 다른 디지털 기기도 못 가져오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학교 학생들의 부모가 대부분 구글이나 애플에서 일하는 아이티(IT)업계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최첨단 매체를 만들어 번 돈으로 비싼 등록금을 치르는 발도르프의 학부모들은, 매사에 스마트폰과 인터넷 검색에 의존하다 보면 이해력과 학습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직접 읽고 써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먼저 읽고 그다음은 써볼 것. 많이 듣던 얘기다. 학교에서 충분히 배워 그 중요성을 다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읽기’라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학창시절에 나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있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하는 책. 전자는 만화나 추리소설 따위였고 후자는 권장도서 목록이었는데 무슨 대학에서 선정했다는 고전과 권위 있어 보이는 단체에서 가려 뽑았다는 제목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숙제를 하고 시험을 치르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권장도서를 읽어야 했다. 문제는 읽어도 이렇다 할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는 거다.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상당해서 마치 도입부에만 밑줄이 쳐진 참고서처럼 읽다 만 책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다가 읽고 싶은 책 쪽으로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읽어도 좋겠다 싶은 재미난 이야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런 책들은 대개 ‘기내 반입 금지 품목’ 같은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겨우 숨어서나 볼 수 있었다. 기내에 들고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기분 나쁘게 매를 맞은 적도 여러 번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잘 알려진 역사학자 시오노 나나미의 에세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어학 공부법은 완전히 추리소설 덕이었다. 추리소설이나 스파이 소설은 끝까지 읽지 않으면 재미가 반으로 줄어드니까 단어를 모르는 곳이 있어도 사전을 찾다가는 흥이 깨지게 되니 그런 곳은 제쳐두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을 몇백권 계속하면 제아무리 난공불락인 언어라도 익숙해지는 법. 어느새 공부가 된다.”


 
이 얘기는 독서습관을 기르는 데도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은 지구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시작부터 단테와 도스토옙스키를 들이미니까 나가떨어지는 거다. 일단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주기 마련이다. 미식의 즐거움을 깨달은 이가 매번 다른 종류, 더 나은 ‘클래스’의 먹거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권장도서니 뭐니 억지로 욱여넣어 봤자 남는 것은 졸업과 동시에 책과 담을 쌓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칼럼출처 : 한겨레신문(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5173.html?_fr=m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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