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천천히 추억 만들기 - 송기호 (공주대학교 문헌정보교육과 교수) 2014-06-03 오후 1:53:41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244

걸어서 꼬박 4km를 가야 했던 중학교에는 교실 한쪽 벽을 막아서 만든 조그마한 도서실이 있었다. 책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담임선생님을 따라 몇 번 청소를 하다가 그 묵은 내 나는 곳을 알게 되었으니 그리 멋진 만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책 먼지를 털어내며 톨스토이, 토스토예프스키, 베른, 괴테, 생텍쥐베리 등의 이름을 익히고 그들의 글을 접하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을 연구하며 사는 지금, 나와 학교도서관에 조금은 운명적인 끌림이 있었노라고 덧칠을 하여도 좋을 것이다.

30년을 훌쩍 넘긴 지금은 고추 따기며 풀베기를 피해 만났던 작가와 주인공들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그 때 읽었던 책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도 그렇지만, 그 때 만났던 베르테르와 로테에 대한 생각을 적어 놓은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아쉬움은 고등학교와 대학으로도 쭉 이어진다.
 
그나마 책에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덧칠하고, 요약하거나 나의 생각을 적어 넣기 시작한 것은 전공을 찾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니 고작 손으로 꼽을 만큼 가까운 세월뿐이다. 책과의 만남은 있었으되 추억을 만들어 간직하지 못했으니 그저 반쪽짜리 독서를 한 셈이다. 작가와의 키 재기에서 이겨 봐야겠다는 용기를 갖지 못하고 늘 주는 대로 받아먹었던 것이다. 작가와 작품의 배경을 뒤에서야 알고 앞서 읽었던 내용을 이해 한 적이 많아, 양에 쫓긴 나머지 깊이 있는 독서를 못했다는 부끄러움도 감출 수 없다. 아내와의 7년 연애 동안 주고받은 편지 첩을 보면서 배를 잡고 뒹구는 딸아이의 손에 책과 아빠의 인연을 담은 추억을 쥐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보여주기 위한 독후감상문이나 독서기록장을 남기지 못한 것을 탓하거나 작심하고 쓰는 감상문을 옹호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권장도서며 추천도서가 즐비하고 누군가 달아 놓은 줄거리와 해설이 함께 있는 책마저 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은, 독자로서 무언가 기록하고 남긴다는 것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미숙함을 꼭 드러내 보여야 할 것만 같아서 불안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삶의 여정 속에서'사랑은 길들이는 것'이라는 여우의 말에 대한 느낌의 변화를, 임금과 지질학자가 상징하는 바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되짚을 수 있는 추억거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갈매기 조나단의 높이 날기 위한 외로움과 슬픔의 이유를 모범 답안처럼 암기하기 보다는 밑줄을 긋고 물음표를 던져 놓거나 일기장에 넣어 준다면,'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한 문장을 뜻 없이 기억하는 것보다는 더 뜻 깊은 추억을 남기는 것이다. 이제는 꼭 노트나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페이스 북이나 개인 홈페이지에 한 줄 또는 서너 줄씩 적어 넣어도 뒷날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충분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다독(多讀)이 나쁘지 않지만 또 하나의 아쉬움은 천천히 깊이 읽는 즐거움을 갖지 못한 것이다. 책은 단순히 종이와 인쇄술로 정보를 담고 있는 물리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 또는 사회․문화적인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천천히 읽기는 이 출생의 비밀을 작가의 안내를 받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지적활동이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을 보는 눈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창 시절, 천천히 깊이 읽는 경험을 갖기를 나의 실패를 통해서 권한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태백산맥을 만나거나 선생님이 태백산맥을 추천해주는 운명적인 인연이 생겨서 ‘천천히 추억 만들기’의 첫 발을 내디디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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