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운동 독서칼럼
행복한 중독 - 이경혜 (동화작가, 소설가) 2014-03-21 오후 2:45:00
글쓴이 :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조회수 :
2260

초등학교 1, 2학년 때 나는 골방에 파묻혀
글자라고 생긴 것은 무엇이든 다 읽었다.
백과사전도, 어른들의 소설책도 생각 없이 줄줄 읽어댔다.
글의 내용이 아닌 활자 자체를
책벌레처럼 우걱우걱 먹어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외로웠던’ 나는
그렇게 하여 평생을 그 후유증에 시달릴
활자 중독증에 걸리고 만다.
활자 중독이란 곧 책 중독이라 그 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도 나는 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보내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에는 아동 도서란 게
그다지 많지 않아서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어린이 책을 다 읽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우리 집과 친구들 집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다 읽고,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도 빠짐없이 다 읽었다.

서점에서 내가 읽지 않은 제목의 책을 만나면
설사 그 책이 이미 내가 읽은 책과 제목만 조금
다르게 번역된 같은 내용의 책이라 할지라도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마치 자신이 정복하지 못한 여성을 만난 플레이보이처럼!).
그래서 어떻게든 그 책을 구해 반드시 읽고야 말았다.

성인 도서를 읽게 되면서,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읽어도
세상의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몹시 절망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나는 책과 인생이
분리되지 않는 기이한 삶을 보내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은 내게 한 시기를 지배하는 교주였다.
연애만 하더라도 당시 읽고 있던 책의 영향을 극도로
받아 나는 여주인공을 흉내 내기 바빴고,
내 상대는 남자 주인공과 늘 비교 되어야 했다.
육아 책을 읽느라 실제 내 아이는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고,
요리책을 읽느라 실제 음식은 할 시간이 모자랐다.

외출을 할 때는 허둥지둥 급히 나가다가도
책을 잊고 나왔으면 반드시 다시 돌아가
책을 골라 오는 바람에 약속에 늦기 일쑤였고,
버스나 전철을 탈 때 읽을 책이 없으면
30분 동안 읽을 책을 위해 15분을 걸어서라도
책방에 가서 책을 사 오는
비합리적인 행동도 수시로 행했다.





어릴 때는 길을 걸으며 책을 읽다가
하수도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어른이 되어선 차에서 책을 읽다
내릴 곳을 지나치는 일이 수도 없었다.
책이 없는 천국은 지옥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게 그런 말은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내게 ‘천국’이란 말은 이미 그 말뜻 속에
필수적으로 책이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책 없는 궁전에서 살아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책 있는 감옥 쪽을 택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는 책 중독증,
그런데도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중독 덕분에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 중독되지 않았더라면
어찌 저 험한 생을 이토록 즐겁게 건너올 수 있었을까?
책이 좋다는 얘기는 귀에 박히게 들었을 테니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겠다.
오직 나의 이 황홀한 바이러스가 겨울 독감처럼
여러분의 핏줄 속으로 강렬하게 전염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여러분도 부디 나처럼 깊이 중독되어
어떠한 삶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또한 재미난 한 권의 책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기를 빌어보는 것이다.

 
 
출처 : 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http://www.nlcy.go.kr:8089/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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